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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뉴스 [조선일보]6월 04일 보도자료

관리자 2003.06.05

"[386세대의 자화상] 34명의 386이 말하는 빛과 그늘

“정문 쪽에서 한바탕 충돌이 벌어졌다. 중무장한 딱정벌레 형상의 사내들이 일제히 학교 쪽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전진하는 모습, 이따금 펑펑 터뜨려대는 폭죽 같은 최루탄 발사와 이어지는 재채기, 그리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콧물… 이 모든 현상이 슬프게 느껴졌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87학번으로 입학, 현재 삼성물산 과장으로 있는 노창현씨의 기억이다. ‘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의 질풍노도 속에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를 일컫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용어다. 그들은 분노와 좌절, 저항 속에 20대를 보냈지만 1990년대 이후 정계와 기업, 시민단체에 활발하게 진출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허리 역을 하고 있다. 386세대는 특히 노무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을 구성하고 있어, 노 대통령 스스로 ‘83학번’과 자신을 동일시할 정도다.

이들은 20년 전 학창 시절 자신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을까? 또 지금 한국 사회의 중추로 다가선 386세대의 감성과 세계관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됐을까?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와 80년대 그의 강의를 들었던 386세대 학생들이 공동 출간한 ‘386세대, 그 빛과 그늘’(문학사상)은 이 세대의 진솔한 실체를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생생하게 토로한 종합보고서다.

한 교수는 1981~1989년 서울대 ‘사회학 개론’ 수강생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대학 입학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가치관 형성과정에 관한 보고서를 학생들에게 요구한 것. 이렇게 해서 모인 보고서가 2400여개. 보고서 작성자는 1학년이 76%, 2학년이 17%였고, 내용별로는 가치관을 둘러싼 갈등이 34%로 가장 많았고, 학생운동 12%, 진로문제 11%순이었다.

한 교수는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1999년 주소가 확인된 1200여명을 대상으로 우편 설문 조사를 했다. 절반 가량이 회신을 보냈다. 386세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순위 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꼽혔고(37%), 다음이 광주항쟁(34%)이었다.
6세대는 비판적 성향이 강하다’는 문항에는 91%가 동의했고, ‘386세대는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에 74%가 동의했다. ‘386세대는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 과잉’의 경향이 있다’는 문항에도 7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에 나온 ‘386세대, 그 빛과 그늘’에는 80년대 당시의 보고서 2400편 중 선정된 34편과 그 이후의 설문 조사 등을 토대로, 수치만으로는 접할 수없는 이들 세대의 정신적 경험과 정체성 확립과정이 생생한 육성으로 드러나있다. 필자들은 현재 대학 교수, 변호사, 벤처 기업인, 대기업 사원, 언론인, 의사, 학원 강사 등 다양하다.

“문익환 목사의 강연을 듣다가 이동수 학형의 분신을 목격하고서 나는 돌을 손에 들게 되었다. 약한 자의 몸부림은 폭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피억압자를 돕는 일은 억압자를 돕는 일보다 선행돼야한다고 생각했다.”(전영재·1986년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현재 구조조정 전문회사 Value Gate 대표)

386세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는 1980년 광주항쟁이었다. 의예과 87학번인 김유선 인제대 교수는 광주항쟁을 통해 현실을 보는 눈을 뜨게 된다. “원래 사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격이었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항상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학생들이 하는 데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광주의거의 참혹한 실상은 유언비어도,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과장도 아닌, 정말로 일어났었던 진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나는 지난 과오를 시인함과 동시에 지금껏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던 여러 가지 일들의 옳고 그름을 이제는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경제학과 89학번으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조두현(사법연수원 33기)씨는 대학 1학년 때 노동 현장 방문을 통해 가치관을 재정립하게 된다. “노동형제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나에게 정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막연히 잘못 알고 있던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고 그들의 투쟁의 정당성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도로서보다 구체적이면서 논리적으로 우리의 노동현실을 깨쳐나가야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세우게 됐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민족과 민중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도 역력하다. 경제학과 84학번인 박경로 경북대 교수는 “어느 때는 정의 구현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교도소에 갇힌 내 모습과 5대 독자를 감옥에 보내고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며 한숨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고 적었다.

‘운동권’을 집단적으로 배출하고, 획일적 가치관을 지녔다고 비판받는 386세대이지만 그 안에도 다양성은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매년 이들을 갈등하게 했던 수업 거부와 시험 거부에 대한 입장이 그렇다. 사회학과 80학번인 정일균 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시험거부 반대파였다. “수업과 시험거부가 나름대로의 정당한 논리에 의한 움직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결정과정과 그런 결정에 학생들을 승복시키는 방법에 찬성할 수 없었다. 수업과 시험거부에 동조하기를 바라는 주위의 이목이 이에 찬성하도록 커다란 심리적 압박감을 행사했다.”

길게는 20년이 흐른 지금, 386세대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김주영(사회학과 82학번) 제3영상 기획실장은 “대학 시절 거대 담론에 치이면서 실존적 자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하나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동년배 386세대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고 했다. 구형진(의예과 87학번) 눈에미소 안과 원장은 “386세대는 이 시대의 주축이면서도 가장 푸르러야 할 청년기에 가장 우울했던 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며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잘못하면 피해의식과 함께 현재의 정권이나 정책에 대한 불신과 거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386세대, 그 빛과 그늘’ 필자들은 4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출판 기념회를 겸해 길게는 20년 만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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